사타케 요시치카 (18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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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타케 요시치카는 1839년 구보타 번의 10대 번주 사타케 요시히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4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8세의 나이에 11대 번주가 되었다. 1854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를 알현하고, 이듬해 영지인 아키타를 방문했다. 그는 가신단의 지원을 받아 재정 개혁과 신산업 장려를 추진했으나, 1857년 도사 번의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과 결혼한 해에 사타케 가문의 반란 시도가 있었다. 같은 해 병으로 사망하여, 구보타 신덴 번의 사타케 요시타카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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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치카 (183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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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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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타케 요시치카 (佐竹義睦) |
출생 | 1839년 7월 2일 |
사망 | 1857년 8월 20일 |
사망 장소 | 구보타 성, 아키타, 일본 |
묘소 | 아키타현 아키타시 이즈미 산미타케네의 텐토쿠지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이명 | 오스케 (雄丸, 유년 시절 이름) 지로 (次郎, 통칭) |
관위 | 종4위하시종, 우쿄다이부 |
씨족 | 사타케 씨 |
정치 경력 | |
번 | 데와구보타 번 번주 |
직책 | 구보타 번 번주 |
대수 | 11대 |
재임 기간 | 1846년 ~ 1857년 |
이전 | 사타케 요시히로 |
이후 | 사타케 요시타카 |
정치 체제 | 다이묘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사타케 요시히로 |
어머니 | 아베 씨의 딸, 쇼센인 |
배우자 | 세츠코, 도사 번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 |
자녀 | 요시타카 (양자) |
2. 생애
사타케 요시치카는 1839년 사타케 요시히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베 씨이며, 어릴 적 이름은 오마루였다. 1846년 아버지 요시히로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1854년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공식적으로 알현하여 지위를 확정받았다.[1] 그는 영지를 방문했으며, 미성년이었기에 씨족 원로 회의가 영지를 운영하며 재정 긴축 정책과 새로운 산업 개발을 지속했다.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 에쓰코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사망하여, 사타케 요시타카를 말기 양자로 맞아 가독을 상속시켰다.
2. 1. 가독 상속과 초기 번정
고카 3년(1846년) 11월 4일, 아버지 사타케 요시히로가 사망하면서, 구보타 번의 10대 번주였던 사타케 요시치카는 8세의 어린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11대 번주가 되었다. 안세이 원년(1854년) 10월 15일,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오메미에하여 정식으로 번주 지위를 인정받았으며,[1]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종4위하 시종, 우쿄 대부에 서임되었다.[1]안세이 2년(1855년) 5월 11일, 사타케 요시치카는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인 구보타 번(아키타)을 방문하였다. 요시치카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번의 실제 운영은 가로(家老) 사토 겐에몬를 비롯한 가신단 회의에서 맡았다. 이들은 재정 긴축 정책을 추진하고, 직물업을 중심으로 한 신산업을 장려하는 등 번정 개혁을 시도했다.[1]
2. 2. 중앙 정계와의 관계 및 혼인
안세이 4년(1857년) 3월 28일, 요시치카는 도사 번 번주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 에쓰코와 결혼하였다. 이는 유력 다이묘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2. 3. 쿠데타 시도와 사망
안세이 4년(1857년) 3월 28일,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 에쓰코와 결혼하였다. 같은 해 5월 20일, 두 번째 오쿠니이리를 하였다. 같은 해 5월 21일, 소마 미키타네의 다섯째 아들인 사타케 요시노리가 사토 노부히사 등의 복권을 꾀하는 쿠데타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사타케 가문의 동부 분파가 주도한 것으로, 이들은 요시치카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1]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같은 해 6월 3일, 요시치카는 병에 걸렸다. 결국 7월 1일 아키타에서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구보타 번의 번정 개혁은 중단되었다.[1] 법호는 겐료인 문가쿠진유이며, 묘소는 아키타현아키타시 이즈미 산가쿠네의 덴토쿠지이다.3. 사후
요시치카는 야마우치 도요스케의 딸 에쓰코(료쿄인)를 정실로 맞이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했다.[1] 구보타 신덴 번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초명 요시카쿠, 종가를 잇게 되면서 요시나리로 개명, 후에 요시타카로 개명)를 末期養子|말기 양자일본어로 맞아 가독을 상속시켰다.[1]
4. 가계
5. 요시치카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은 인물
- 하야카와 '''무'''유
- 다카야 '''무'''사다 (다카야 아쓰타카의 차남)
- 다카야 '''무'''아키 (다카야 아쓰타카의 삼남, 후 가치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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